지연 / 고창 / 문화기획

지연
발행일 2023.12.22. 조회수 351
나고 자란 사람, 로컬을 궁금해하는 사람, 로컬로 돌아온 사람 전라북도 정주여건을 개선하려는 사람 바다/산/강을 사랑하는 사람

자기 소개

이미 빽빽한 대도시에선 결코 생성될 수 없는 다양한 문화적 상상이 비교적 여백을 간직한 소도시에선 가능하지 않을까는 기대감으로 3년 전 고창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울과 고창처럼 거주하진 않더라도 철원, 양양, 해남, 고흥 등 여러 지역과 협업으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울에선 2014년부터 2021년까지 동대문옥상낙원DRP(Dongdaemun Rooftop Paradise)의 공동운영자로 활동했고요. 지금은 독립문화기획자의 정체성으로 전시, 문화예술교육, 축제, 연구, 문화예술프로젝트 등 다양한 영역에서 고군분투 중입니다.
   
인스타: @jiyeon_0721 www.instagram.com/jiyeon_0721
이메일: jiyeon90721@hanmail.net
 

지역활동 소개

생활인으로서 지역에서의 라이프 사이클을 소개해 주세요.

일주일을 서울에서 3일, 고창에서 4일로 나눠 지내는 ‘다거점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온 지 어느새 3년이네요. 저는 작업 할 때 속도가 빠르고, 몰입도가 강해요. 그래서 알게 모르게 몸과 마음의 긴장도가 높아 집니다.

서울에 있을 땐, 대학원 생활과 일을 하며 빡세게 효율적으로 지낸다면, 고창으로 내려오면 좀 더 제 내면이 건강한 사이클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돌보며 지내는 편입니다. 산, 들, 강, 바다, 습지 등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며 산책을 하는 기쁨이 좋고요. 요즘은 고창 근교 지역인 장성의 매력에 빠져서 자주 갔었어요. 지역에서 생산된 제철 식재료로 요리를 하고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서울에선 ‘효율! 철저! 바쁘게!’를 모토로 지낸다면, 고창에선 잠시 멈췄다가 또 다시 정처 없이 헤매는 시간을 즐기는 것 같아요.
 
직업인(지역문화생산자)으로서 지역에서의 라이프 사이클을 소개해 주세요.

지역문화생산자로서 고창 작업은 주로 지역 안에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어요. 고창의 작고 아름다운 마을인 독곡마을 생태탐방길에서 자연과 상호작용하며 개인과 지구의 연결성을 느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담긴 워크북 ‘나와 지구를 치유하는 재연결 매뉴얼’, 운곡습지 동식물 그리고 자연이 발신하는 소리, 마을 할머니의 목소리를 채집하고 창작하는 ‘사운드 캠프’, 쇠퇴해가고 있지만 지역의 중요한 상권인 전통시장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조양관, 전통시장, 동리로의 기억을 찾다’ 등을 기획하거나 창작자로 참여해왔습니다.

지역에서의 작업은 자주 마주하는 것부터 시작해요. 그래서 발품을 많이 팝니다. 이야기도 자주 들어야 해요. 리서치도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역에서 흥미롭다고 생각한 건 기성자료가 많지 않아서, 제가 관찰하고, 리서치하고, 대화하며 새롭게 발굴해야 하는 것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지역의 일은 현장성이 강한 작업이라고 느껴집니다. 지역에서의 라이프 사이클은 현장을 누비는 것들이 떠오릅니다.


지역 활동의 시작과 동기가 무엇이었나요?

자연이 아름다워서, 지역소멸이 가까워서, 문화격차가 커서... 이런 당위성 때문에 지역 활동을 시작한건 아닙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요. 서울은 거울로 가득 찬 도시라고 느껴졌어요.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도시를 상상해보실래요? 장단이 있죠. 내 취향, 필요를 얄미울 정도로 간파한 장소가 잔뜩 있죠. 그래서 선택할 범위가 넓고, 만족도가 높고, 편리합니다.

하지만, 거울은 앞에 서있는 동안 잠시 내 모습이 투영되는 거지 깃들진 않잖아요. 서울은 그런 느낌입니다.

저는 오래 오래 머물며 깃들 장소를 찾고 싶었어요. 서울은 이미 빽빽하게 기획된 땅이기 때문에 깃든다는 감각을 소유하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소도시로 간다면 가능해?’ 란 호기심이 들었고, 고창에 거점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영감을 주는 지역의 장면은 무엇인가요?

너무 사소하지만, 저는 야생성을 간직한 나무를 보면 큰 영감을 받아요. 이 생에 고창 땅에 심어지고 싹을 틔우고 주어진 환경에 따라 자란 나무들이요. 많은 위안과 영감을 받아요.

저는 늘 어떤 역할을 잘 해내고 싶은 충동을 간직하고 살아왔어요. 하지만, 야생적인 자연은 그렇지 않죠. 사람에 의해 기획되지 않은 땅에서 태어나면서 간직한 모양과 순리에 따라 살다가 사라져요. 그게 생의 목표이고, 만족인 것이요. 저대로 살면서 환경에 따라 완결성을 갖추는 그런 모습들이요.

그래서 고창으로 왔나 봐요. 좀 더 야생적인 장면들을 보고 배우고 따라 살고 싶어요. 
 

지역에서의 성장 경험

지역에서 경험한 성취와 좌절, 성장의 경험을 이야기해주세요.

작년 가을에 후기 청소년 문화예술교육프로젝트의 참여자를 제가 사는 고창에 초대했어요. 일제강점기부터 쌀과 소금을 가공하고 보관하던 공장으로 운영되다가 지금은 폐허가 된 (옛)삼양사를 방문하고 우리는 1만 평의 땅에 매료되고 말았지요. 이 장소에 대한 상상을 나누다가 결국 예정된 회차를 넘어 후속 모임으로 이어지기도 하였고요. ‘오래되고 텅 빈 장소’에 우리는 왜 매력을 느꼈을까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빽빽한 도시구조와 부동산 논리의 야박함이 동시에 떠오릅니다. 핫플레이스의 근사한 공간 서비스로는 절대 충족되지 않는, 오래된 먼지와 수상한 사물이 전부인 빈 장소에서 생성될 수 있는 상상의 해방감에 주목하는 시간이었어요. 땅에 대한 감각과 욕구가 내 방, 도시, 사회까지 번져야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정말 기뻤습니다.

특히, 저와 나이 차이가 나는 20대 초반 친구들도 공감하는 모습을 보며 ‘아! 땅에 대한 상상을 하는 즐거움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감각이구나!’를 확인할 수 있어 좋았어요. 좌절은 아직 잘 모르겠어요. 

관계의 확장

지역에서 가장 많이 교류하는 사람 한 명을 소개해주세요.

제가 고창에 내려오고, 이후에 문화기획자로 활동하는 이원재, 육끼 두 분이 고창으로 이주하셨어요. 저희는 서로의 집이 보일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기도 하고요. 만나서 같이 산책하고요. 맛있는 식사를 나누고요.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일상을 나눠요. 그리고 함께 고창과 관련된 작업들도 해나가고 있고요.

서울에서 지낼 때와는 다른 밀도와 관점으로 관계와 작업을 만들어 간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욱 소중해진 사람들입니다. 원래 좋은 사람들이지만, 고창에서 함께 지내니 더욱 소중해졌어요!    

2023년 회고

올 한해 지역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활동 또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수박행성: 만ㅅ나요(만나요-맛나요)’는 고창을 애정하는 두 창작자 김준우와 이지연이 수박과 관련된 다양한 현장과 사람들을 만나가며 고창을 더 알아가는 프로젝트인데요.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만난 50년 간 수박농사를 지은 농부 김한오님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반 백년을 한 가지 일을 한 사람의 내공과 지혜랄까요. 농사를 시작한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쭉 해주시는데, 한국 농업의 서사가 읽히더라고요. 그리고 최근엔 기후위기로 변화하는 농업현장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는데, 걱정도 많이 되고 또 다시 농업환경도 많이 변화하겠구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겨울나기

겨울(비활동기간)을 건강하게 충전하며보내는 노하우를 알려주세요.

문화예술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겨울은 비수기라서 회복하는 시간으로 많이 보내잖아요. 저는 코로나 이전엔, 12~1월까진 미친 듯이 작업을 하다가 겨울이 완연해지면 해외로 나가 탕진과 회복을 하는 루틴이 있었는데요. 고창으로 이주한 후엔,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회복과 만족을 하는 방식으로 변화했어요.

작업에 있어서 회복 노하우는 결국 작업을 나 자신의 단위에서도 잘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겨울엔, 나의 작업을 재정의하거나 재배치하는 작업을 중요하게 합니다. 1년 혹은 짧은 단위로 이뤄진 프로젝트들을 결말에서 과정으로 재배치하는 작업이죠. 일정 안에 달성해야 하는 목표로 인해 누락된 실천, 더 연결함으로 생성될 가능성, 확장 또는 집중될 수 있는 관계망, 정돈하지 못한 생각 등 긴 호흡으로 늘어뜨리며 프로젝트를 다시 바라봅니다. 이 시간을 꼭 보내야 내년에도 활동을 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 같아요.

지역의 변화와 위기

여러분이 살고 활동하는 지역의 위기나 위험 요인이 있나요?

제가 고창에서 만든 장면의 이름이 있어요. 바로 '필라이트 6pm'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분들이 일을 마친 오후 6시쯤에 다 같이 모여 필라이트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자주 목격해요. 하지만, '필라이트 6pm' 이 시간과 장소가 아니면 제가 일상생활을 하는 고창의 장소들에선 외국인을 잘 볼 수가 없어요. 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수박과 관련된 사람들과 정보를 수집하며 창작하는 수박행성이란 프로젝트를 했는데요. 그 중 농부님이 이제는 외국인이 없으면 농사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하신 게 기억이 남아요. 그리고 고창엔 결혼이주를 한 분들도 굉장히 많죠. 하지만, 외국인이 지역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섞여있다는 느낌은 잘 안 들어요. 내년엔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연구하고 활동으로 실천 해보고 싶어요.
   
「한국여성의 인권에 대해 알고 싶으면, 구글에서 ‘길거리’를 검색해 보라(이지은, 2020)」 이란 논문을 읽고, 호기심에 유튜브에 ‘농촌 여성’을 검색한 경험이 있습니다. ‘여성 혼자 귀농하면 생기는 일’, ‘여자 홀로 귀농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이유’ 등 무시무시한 콘텐츠가 나오더라고요. 보수적인 농촌사회에서 여성이 얼마나 대상화되고, 본인의 동의 없이 누군가의 잠재적 아내로 여겨지고, 매우 적은 사회진출의 가능성 등 농촌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주체적으로 살아가기에 비적합한 환경을 고발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도 농촌에 사는 여성 당사자로서 공감되는 이야기들도 있었습니다. 내년엔 농촌페미니즘을 주제를 좀 더 깊이 살펴 볼 계획입니다.   

지역에서의 꿈

지역에서 꾸는 ‘꿈’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얼마 전, 개인사업자 이름을 ‘작은불연구소’라고 지었어요. 내가 있는 문화예술 현장, 특히 고창에서 조그마한 모닥불을 피워 다양한 존재들이 온기를 쬐러 모이고, 요리를 나누고, 덩달아 춤도 추다 보면 어느새 모두에게 불 냄새가 스미는 그런 따듯한 순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로컬의 미래

내가 기대하는 로컬의 미래와 이를 위해 스스로 만들고 싶은 활동이나 협업을 제안해주세요. 


저는 많은 사람들이 잠시 자신을 멈추고, 나와 내면의 분리감을 응시하는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어요. 저 또한 그런 시간이 필요하고요. 잠시 멈추기에 로컬은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해요. 나와 몸, 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 안에서 우리가 상실해버린 연결 감각은 무엇인지를 탐색하고 성찰하다 보면 로컬의 미래도 그려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협업에 관련해서는 다들 지역에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요. 인스타로 소식을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되지 않는 호기심입니다. 내년에는 많이 만나서 대화하고 싶어요. 제가 사는 고창에도 열심히 초대할게요!   

고흥은?

고흥이란 지역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생각을 알려주세요.

고흥은 어릴 때부터 자주 가던 지역입니다. 엄마가 태어나 성장하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 멀어서 자주 갈 수 없는 바람에 늘 그리운 마음이 있기도 했어요. 지금은 친구들이 고흥에 터를 잡고 살고 있어요. 그래서 자주 가진 못하더라도 늘 연대하는 마음을 간직한 지역입니다.
 
컨퍼런스에서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제안해주세요.

100년 뒤에도 남았으면 좋겠는 내가 사는 지역의 가치


 

댓글 (1)

글을 읽는 내내 활동하시는 모습과 지역이 그림처럼 떠오르네요. 존중과 지지를 보냅니다.^^